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이시다 미츠나리 (문단 편집) === [[임진왜란]]의 참혹한 실패 ===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[[고니시 유키나가]], [[가토 기요마사]] 등과 선발대로서 참전했는데 주로 전투 지원 위주의 임무를 맡다가 [[평양성]]을 빼앗긴 이후 ([[평양성 전투]]) 벽제관에 숨어 있다가 [[명나라]] 군대를 [[요격]]했다.([[벽제관 전투]]) 당시 명나라 군대는 [[패잔병]]을 뒤쫓느라 여념이 없어서 다른 곳에 주둔하고 있는 일본군을 신경쓰지 않고 있다가 반격을 당했다. 명나라 군대를 요격한 이후에는 [[행주산성]]으로 향했고, 거기서 [[행주 대첩]]으로 처절하게 당하고 왔다.[* 공교롭게도 원균도 자침하거나 잃은 배 수가 170~200척인데 비해, 전과는 겨우 18척 격침 정도다. 즉 자신이 10척을 잃을 때 왜군의 1척을 부순 것이다.] 당시 이시다 미츠나리는 병력의 수적 우세를 믿고 무작정 공격했는데, 이것이 패전의 원인이 되었다. 당시 조선측에서 [[권율]]이 [[지휘관]]인 [[행주산성]]은 한강을 뒤에 둬서 [[배수진]]의 상태였는데, 문제는 진입로가 좁아서 대군이 한 번에 다 들어가지 못하여 이시다가 믿고 있던 수적 우세라는 장점을 살릴 수가 없었다.[* [[호리병]] 같은 지형으로 [[병목 현상]]이 심하다. 당연히 무지성 [[어택땅]]을 걸면 꼬라박는 족족 병력이 갈려나가고, 나갈 때도 빨리 못 나가서 병력이 갈려나가는 지옥 같은 지형이다. ] 그러나 상대를 얕본 나머지, 지형에 맞는 전술을 내지 않고 결국 일본군은 보병 돌격, 그것도 3열 횡대의 보병 [[돌격]]으로 [[승부]]를 보려 했다. 상대가 조직적 무장을 갖추지 못한 [[의병]]이라면 모르겠으나, 엄연히 전장에 적응한 조선의 [[정규군]]. 권율에게는 아주 훌륭한 먹잇감이 된 셈이다.[* 거기다 정규군답게 여러 화약무기를 보유했는데도 불구하고 그냥 돌격시켰다는 점에서 미츠나리의 군사적인 능력이 의심되는 정황이다.] 결국 이시다 미츠나리가 지휘하는 일본군들은 말 그대로 '[[총알받이]]'가 되었다. [[권율]]은 오직 그 비좁은 입구에만 [[화력]]을 집중시킬 수 있으니 굉장히 편하게 전투를 했지만, 일본군들은 횡대로 줄을 선 상황이라 이건 조선군의 화력이 집중돼서 앞으로도 못 나가고 뒤에 줄 선 아군 병력 때문에 뒤로 빠지지도 못하고 그야말로 [[진퇴양난]]이었다. 병력을 이런 식으로 굴리니 패배는 당연했다. 그래도 아군의 1할에 불과한 소수의 조선군이었다. 이시다 미츠나리는 조선군이 아무리 순간적인 화력이 우세해도 조만간 바닥이 날 것이라고 생각했다. 하지만 상대는 조총 외에는 냉병기밖에 없던 전국시대 일본과 달리 [[신기전]], [[비격진천뢰]], 각종 [[총통]] 등 온갖 기상천외한 무기들이 [[화력덕후|쏟아져 나오는 통에]] 일본군은 계속 일방적으로 당하고만 있었다.[* 거기다 일본 수군을 많이 격침시킨 이순신이 손수 천자총통을 권율에게 써보라고 선물해주었고 대변으로 염초를 만들 수 있다는 조언을 해준 것 덕분에 조선 육군도 상당히 강화되었다.] 그래서 하는 수 없이 조선군 진지에 불을 지르기 위해 불화살로 대응해보기도 하지만 조선군 진지 바로 뒤가 [[한강]]이었다. 조선군은 목책에 물을 뿌려 불화살 공격도 무력화시켰다. 물론 이시다의 예측이 완전히 빗나간 건 아니라서 행주산성의 조선군들은 전투 후반부에 이르러서는 정말로 화력이 고갈되어갔고, 이 때문에 진형의 일부가 돌파되기도 했다. 그러나 권율이 직접 도망병의 목을 치며 독려를 해서 버티는 와중에 경기수사 이빈의 지원 부대가 화살을 잔뜩 갖고 도착하여 조선군의 기세가 살아나고, 그 뒤를 이어 전라도에서 올라온 조운선 수십 척이 나타나 일본군 진지 뒤로 상륙하려는 모습을 보이게 된다. 이걸 보고 안 그래도 행주산성의 견고한 방어선을 뚫지 못하고 있던 일본군들은 결국 일제 퇴각을 감행했다.[* 또 다른 말로는 일본군이 이 조운선을 이순신 휘하의 조선 수군인 줄 착각했고 자신들의 후방에 내릴려고 하자 지원병인 줄 알고 겁먹었다고 한다.] 이 와중에 [[우키타 히데이에]]는 [[승자총통]]에 맞아 땅바닥을 뒹굴며 사경을 헤멜 정도가 되었는데 왜병들이 들쳐 업고 도망쳐서 간신히 살았다. 이시다 미츠나리나 킷카와 히로이에, [[안코쿠지 에케이]] 역시 모두 승자총통을 맞고 부상을 당했다.[* 킷카와 히로이에, 안코쿠지 에케이가 여기에서 전사했다면 세키가하라 전투의 향방이 달라졌을 가능성이 높았다.] 결국 3만 명을 이끌고 2천 명을 상대하면서 행주산성을 함락시키지도 못한 채 경이적인 피해를 입었다. 변명이 가능한 호조씨 오시 성 공략과는 달리 이것은 빼도박도 못할 참패였다. 게다가 조선에 투입된 일본군의 전체 숫자가 처음에는 16만이었지만 다수의 병력이 손실되어 1593년에는 이미 절반 가량으로 줄어든 상태였음을 고려한다면 집안이 [[가이에키]](개역, 改易)되고 이시다 미츠나리 본인이 [[참수형]] 후 [[효수]]당해도 할 말이 없는 [[실패]]라고 할 수 있었다. 그러나 행주대첩에 참여해 똑같은 패배를 당한 다른 무장들의 면면을 보면 군사적으로 유능했다는 평가를 받는 인물들이 상당히 많음을 알 수 있다. 그렇다면 가장 큰 책임은 병력을 축차투입한 총사령관 우키타 히데이에에게 있다 할 수 있는데, 이 인물 역시 벽제관에서는 명군을 상대로 대승을 거둔 바 있다. 즉, 이시다 미츠나리가 무능했다기보다는 대다수 일본군 무장들이 전황을 지나치게 낙관적으로 판단해 단기전으로 승부하려 했으나, '조선군의 [[우주방어]]에 완전히 막혔다!'라고 볼 수 있다. 결과적으로 행주산성의 대패는 확실히 심각했고 그의 군재에 의문을 주기엔 충분한 것이었기 때문에 더 이상 지휘관으로는 임무를 수행하지 못했다. [[정유재란]] 때는 주로 [[외교]] 및 [[행정]] 쪽에 전념하게 되었는데 [[도요토미 히데요시]]의 죽음으로 인하여 [[임진왜란]]은 끝나게 되었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